프란츠 리스트(Franz Liszt, 1811-1886)
『시(詩)적이고 종교적인 조화』에서, <장송곡>

글쓴이:박수원
 
문득 아침에 눈을 뜰 때, 여러 가지 생각에 사로잡힐 때가 있다. 음악을 업으로 하여 살아가면서 이루고 싶은 일도 참 많은 까닭에, ‘지금 내가 제대로 살고 있는지’에 대한 원초적인 물음에서 비롯하여 사사롭게는 주변 가족들 신변에 이르는 온갖 상념들이 밀려온다. 이렇게 마음이 어지러울 때, 필자는 앞서 살았던 선배 음악가들의 삶을 되돌아보며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많은 위로를 받곤 한다.
지금으로부터 이백 여 년 전, 헝가리 서쪽 끝, 라이딩(Raiding)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한 음악가가 태어났다. 여덟 살 때 흥얼거리며 음악을 지어냈고, 열한 살에는 이미 피아니스트로서 주목을 받았던 당대의 천재 프란츠 리스트…, 호리호리한 체구에 적당히 긴 단발머리를 휘날리며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최고의 예술가였지만, 일흔 다섯 해 남짓한 그 삶은 온갖 좌절과 슬픔으로 가득했다. 우선, 많은 이들이 너무나 당연히 누리는 평범한 결혼 생활은 그에게 결코 허락된 삶이 아니었다. 십 대의 풋사랑은 제쳐 놓더라도, 그의 감수성과 음악을 이해해줄 만한 반려자와의 번듯한 사랑이 모두 실패로 끝나버렸던 것이다. 특히 서른 살 초반에 만났던 폴란드 공주 카롤린과의 교감과 사랑이 법적인 문제로 인해 불발로 그치게 되자 리스트는 심한 상처를 받게 된다.
“지난 날 당신을 수없이 바라보았던 이 방의 탁자와 창가에서 끝없는 고통과, 눈물, 사랑에 홀로 잠겨있습니다. 당신의 흔적이 배어있는 주변의 모든 것들은 말할 수 없이 흘러내리는 슬픔만 나에게 전해줍니다!...”
(1851년 1월 22일 리스트가 카롤린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비단 사랑에 관한 문제뿐만 아니라, 꿈과 현실 세계와의 괴리감은 뛰어난 감수성을 지닌 리스트와 같은 예술가에게 또 다른 시련을 안겨주었다. 리스트의 조국 헝가리는 당시 오스트리아의 식민지였고 몇몇 뜻있는 지도자들이 앞장서서 독립을 위한 혁명 전쟁을 벌였던 시기였다. 고통 받던 헝가리 국민들의 입장에서 볼 때, 조국의 독립은 정의고 진실이었겠지만 약육강식의 국제사회 논리는 정반대의 결과를 가져왔다. 결국, 1849년에 헝가리 혁명은 무력 진압되었고, 그 와중에 주동자들은 모두 처형당하게 되는데, 리스트의 친구 세 명도 이 가운데 포함되어 있었다. 진정 위대한 예술은 이 같은 역경을 딛고 탄생하는 것일까? 이듬해 <장송곡>이라는 제목으로 ‘진실을 거부할 수 없어 목숨을 버린’ 옛 친구들을 향한 구구절절한 추모의 정을 자아내기에 이른다.
“세상으로부터 짓밟혀 영혼의 외로움 속에서 생각조차 거부당한 채, 오로지 눈물을 흘리며 기다리며 하늘만 바라보다가 고통으로 일그러진 마음을 가진 이들이 있다. 과연 그들은 자신의 외로움을 빼어 닮은 음악에 마음을 열어 아름다운 화음을 함께 느끼고, 듣고 말할 수 있을까? 음악이여, 그대의 말을 빌어 기도하며, 그대의 눈물로써 우리 역시 흐느끼니, 그대의 노래를 통해 구원을 청하노라!”
(『시(詩)적이고 종교적인 조화』서문에 인용된 라마르틴(Alphonse Lamartin) 시의 단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