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림'(1997. 7월호)에 기고된 정웅섭 교수의 글입니다.

오늘날 우리 세계에서 발전되는 것은 "문명"일 뿐"문화"는 앞을 향 해 충분히 내닫지 못하고 있다. 문명 - 오디오 기술, 제품 - 이 크게 진보했는데도, 문화 - 인간의 음악 감상, 음악성 -는 크게 뒤쳐져 있 다. 이 사실만큼 비참한 일은 없다. 값비싼 기계에 연연함보다는 큰 도 량으로 "음악사랑"하기가 더 아쉬운 오늘이다. 오디오도 결국은 음악을 듣기 위한 존재여서, "오디오가 있기 때문 에 음악을 듣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는 "음악이 있어야 하기에 오디오 의 존재 의미도 있게 되는 것"이 아닐까. 여기 주객의 전도는 있을 수 없다. 나에게 있어 오디오는 내가 생각하고 바라듯이 들려지기만 한다면 그만인 그런 존재이다. 여기에 음악이 나 자신이 들려지면 생각하듯
이 된다는 말의 뜻은 무엇인가? 그것은 음악에 대해 내가 그려내고 있는 나의 "이미지"에 그것이 어떻게 와 닿는가 함이다. 그러므로 나의 음악 이미지에 100% 맞지는 못하더라도, 그래도 맞는 연주, 녹음, 재생의 세계를 찾아 나섰고, 찾고 있고, 또 계속 찾게 될 것이란 뜻이다.

오디오는 인간의 마음의 윤택을 추구하는 수단이므로, 오디오의 목표는 거의 백 프로 '음악 형성'에 있다. 음악에서 인간의 개성, 인간의 표현 같은 것을 제거하는 경우 무엇이 남을까. 아무 것도 남지 않을 것이다. 음악 표현의 수단이 오디오에서도 그것이 충분히 개성적으로 인간적이지 않다면 그것은 단지 차가운 물(物)의 차원에 머물고 영원히 그 숭고한(?) 목적을 성취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보다 정확하게는, 오디오와 친하면서 음악 듣는 시간과 경험이 축척되면서, 생각도 바뀌는 듯하다. 연주도, 녹음도, 재생도 어느 수준이면 되지 않는가. 좋아하는 음악이 좋아하는 모양으로 들려오면 되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다. 요는 음악을 듣고 있다는, 그것도 계속 듣고 지낸다는 사실이 중요하지 않을까. 오디오의 궁극의
경지, 그것은 오디오 없이도 음악을 만족하게 들을 수 있을 경지가 아닐까. 역설적일 수도 있겠지만 음향기기가 없어도 흡족한 음악 이미지를 창조해 낼 수 있다면, '소리'는 없어도 '음악'은 살아 솟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이런 경지는 쉽게 자동적으로 오지는 않을 것이다.
오디오 기기와의 밀착되고 지속적인 관계 체험이 충분히 축적된 후에라야 터득될 수 있는 게 아닐는지.

오늘날, 이른 바 "놀이"의 수단과 공간이 확대됐다고는 하지만, 내게 있어 아직 오디오 이상의 놀이는 없다. 앞으로 오디오의 세계도 꿈을 실현해 나가듯 끝없이, 급속히 발전할 것이다. 하지만 그 변화의 속도가 다른 놀이의 경우보다 뒤늦더라도, 오디오는 역시 내 속에서의 특별한 존재로 있을 것이다. 그러기에 오디오는 이 "오디오 인생"이 항시 그곳으로 회귀하려는 "마음의 고향(하이마트)" -- 60, 70년대 한 음악 감상실의 이름 -- 이다.